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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관에 울고 미국에 우는 우크라이나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과 동부 지역 내란으로 구소련 소속 국가 중에서 가장 친서방적이며 친미적인 국가로 변신한 국가가 우크라이나입니다. 그런데 이 우크라이나 정부가 2021년 7월 근래에 드물게 미국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중부 유럽 전체에 정치·군사·에너지 위협을 야기했다’는 것인데요. 바로 7월 21일 미국과 독일이 발트해 관통 러시아-독일 직결 가스관 '노르드 스트림-2' 완공에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노르드 스트림-2는 러시아 우스트루가로부터 독일 그라이프스발트까지 발트해를 관통하는 1230km 길이의 가스관인데요. 이 가스관의 목적은 한마디로 우크라이나를 경유하지 않고 유럽으로 러시아 가스를 직송하는 것이지요. 2006년, 2009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으로 발생한 공급 위기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한 복안입니다. 노르드스트림-1 프로젝트는 2009년 갈등 직후에 시작하여 2012년에 완공되었고 노르드스트림-2 프로젝트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시작되었지요.

 

가스관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러시아 가스는 최근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양은 2018년 870억m3, 2019년 740억m3, 2020년 380억m3로 줄어들고 있는데요. 550억m3 규모인 노르드스트림-2가 2021년 8월말에 완공되면 사실상 우크라이나 통과 가스를 대체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에게는 치명적인데요.

 

사진출처 중앙일보

 

우선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30%의 가스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고요. 또한 연간 30~70억 달러에 달하는 러시아 가스 통과 수수료는 우크라이나 GDP의 2~4%에 해당합니다. 2019년 우크라이나의 총수출이 461억 달러라는 것만 봐도 가스관 수수료의 경제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지요. 그리고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무엇보다 큰 우려는 우크라이나 통과 가스관이 무용지물이 될 경우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무력 침공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우려에 대해 이 가스관의 수혜를 입고 있는 폴란드 등 다수의 동부 유럽국가들이 공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적극적으로 노르드스트림-2 프로젝트 건설에 반대한 것은 우크라이나에게 큰 힘이 되었지요.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7월 NATO 정상회의에서 노르트스트림-2 건설에 적극적인 독일이 “러시아의 포로가 됐다”는 독설까지 퍼부었고, 가스관 공사가 95% 이상 진행된 2019년 말 공사 중이던 스위스 기업 '올시즈'(Allseas)가 제재 위협으로 중도에 이탈하게 만들어 1년 간 건설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도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는데요. 제재 1년이 지난 2020년 12월 러시아 부설선 포르투나가 독일 구간에서 작업을 재개하자,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 하루 전인 2021년 1월 19일 미 국무부가 부설선 포르투나와 러시아 선사 KVT-RUS를 제재했지요. 바이든 정부는 더불어 가스관을 깔고 있는 선박들의 보험사와 자재 및 선박을 제공하는 기업들을 추가로 제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 공사를 중단시킬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겠다”는 다짐도 보였지요.

 

그러나 이후 점차 바이든 정부의 입장이 선회하기 시작했는데요. 2월 의회에 제출하는 제재 리포트가 기존의 수준을 반복하는데 그친다는 비판을 감수했고, 급기야 5월에는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독일과 러시아 합작회사인 ‘노르트 스트림-2 AG’와 이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국가 안보' 이유를 들어 제재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7월 21일 독일 정부와 노르드스트림-2 완공에 합의한 것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가스관 수수료는 계속 지불하게 하고 우크라이나 녹색기술 인프라에 5천만 달러를 투자하는 등 우크라이나를 달래는 추가 합의사항이 있었지만 실제로 법적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요. 우크라이나가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과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이미 떠나간 배입니다. 우크라이나가 강대국에 너무나 순진한 기대를 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미국 대외정책의 실리주의에 눈을 감은 것이지요.

 

트럼프 대통령이 노르드스트림-2에 반대한 이유는 명목상 유럽의 대러시아 에너지 의존도 심화, 우크라이나의 경제 및 안보 문제 등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적이 계산이 있었는데요. 우선 유럽 시장에 미국의 셰일가스를 더 많이 팔아야 했습니다. 유럽 가스 수입의 1/4을 차지할 러시아 가스관을 허용할 수 없었지요. 또한 독일 등 유럽 동맹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중심은 셰일가스가 아니라 재생에너지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중국과 일대일 맞짱 대결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유럽 동맹이 필요하고 따라서 동맹의 맹주인 독일과의 관계 회복이 최우선 과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트럼프와는 달리 러시아와 이란을 가능한 한 중국으로부터 떼어내어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옮겨 놓으려 하는데요. 노르드스트림-2는 미국이 독일을 잡고 러시아를 통제할 수 있는 신의 한수입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는 후순위, 애물단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가스관에 울고 미국에 우는 우크라이나는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의 비극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데요.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에 기반한 줄타기,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줄을 끊을 수 없는 무시못할 핵심역량. 이 두 가지 무기를 가지지 못한 우크라이나의 비극이 먼 나라의 이야기이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