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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국은 어떻게 전쟁 자금을 조달했을까

스페인은 어떻게 전쟁 자금을 조달했을까요?

카를 5세에서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다스리던 시절

스페인은 유럽의 패권 국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제국은

끊임없이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스페인 제국의 위세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와 여러 차례 다퉜고,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오스만 제국과 충돌했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을 시작한 군주들과도

갈등했습니다.

또 제국 안에서는 네덜란드가 반란을 일으켰고,

종교와 무역 이익을 두고

잉글랜드와도 일전을 치렀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스페인 제국은 과연 전쟁에 들어가는 자본을

어떻게 조달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대서양 제국에서 금과 은을

약탈하거나 채굴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탐험가들은

귀금속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콜럼버스는 세계 종말을 대비한

최후 성전을 치를 자금을

귀금속을 찾아 마련하려고 했고,

콘키스타도르는 그저 부를 원했습니다.

잉카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피사로의 병사들은

잉카 장인들이 수천 년 전부터

공들여 만들어놓은 수많은 장식품들,

이를테면 금은으로 만든 보석과

접시, 컵, 타일 같은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습니다.

약탈한 재물은 모두 녹여

금은 덩어리로 만들어버렸지요.

카하마르카라는 고원 도시 한 곳에서만

이런 식으로 13,420파운드 무게의 금과

26,000파운드의 은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1533년 3월에서 6월 사이, 그러니까

한 네 달 사이에 잉카뿐만 아니라

안데스 문명의 유물이 이렇게 불타버린 셈입니다.

 

스페인의 금과 은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피에르 쇼뉘라는 프랑스 역사가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와서

2, 3년 만에 약탈한 금의 양이 아메리카 원주민이

천 년 동안 축적한 양과 같다고 합니다.

일단 눈에 띄는 대로

원주민의 금을 약탈한 다음에는

원주민에게 사금 채취를 강요했습니다.

이렇게 금 채굴에 열을 올린 덕분에

스페인은 16세기에 세계 금 생산의

거의 4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금보다 더 중요한 건 은이었습니다.

1540년대 중반에 포토시,

그러니까 지금의 볼리비아에서 은광이 발견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누에바 에스파냐,

즉 지금의 멕시코에서도 은광이 개발되었습니다.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은 포토시 은광을

비밀로 간직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545년에 스페인 사람들이

이 비밀을 알아차려 버립니다.

포토시 은광은 네 개의 노천 광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은이 너무 풍부해서

원주민 노동력과 기술만으로도

쉽게 채굴해낼 수 있었습니다.

한 20년쯤 이런 식으로 은을 채굴했지요.

그러다가 노천에서 은을 채굴하는 게

어려워지면서 더 깊은 곳에서,

은 함유량이 낮은 은광석에서

은을 뽑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 은광에서 사용되던

수은 아말감법이라는 신기술을 들여옵니다.

 

이렇게 채굴된 은은 동전으로 만들어져서

훗날 북아메리카 독립전쟁 때

영국령 아메리카에서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이 돈은

원래 은이 풍부했던 독일에서 불리던 이름인

달러라는 이름으로 유통되었습니다.

그래서 독립 후 미국의 화폐가 달러가 되었지요.

 

1560년부터 1685년까지 채굴된 은의 양은

2만 5천 톤에서 3만 톤 가량이고,

1685년부터 1810년 사이에는

5만 톤에서 6만 톤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귀금속이

세계 은의 85퍼센트, 금의

71퍼센트 정도를 차지했다고 하지요.

여하튼 이렇게 엄청난 양을 채굴했으니

스페인 제국의 황제도

상당한 이익을 거뒀을 것입니다.

이미 1504년에 스페인 국왕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는 귀금속의

20퍼센트를 세금으로 거두는 권리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킨토 레알이라 불리는

특별 재정 수입이었는데,

귀금속 채굴이 늘어날수록

국왕의 수입도 늘어나게 되었지요.

나중에 스페인 황제는

이런 귀금속 수입을 담보로

유럽 은행가들에게서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려오게 됩니다.

 

한 가지 언급해두고 싶은 점은

귀금속 채굴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을

치렀다는 겁니다.

원주민 노동력을 징발하는 데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의 전통적인 제도인

미타를 활용했습니다.

마을마다 정해놓은 숫자의 사람을

노동력으로 내보내는

잉카 제국의 노동력 징발 방식이었습니다.

은광에서 일은 정말로 가혹했던 모양입니다.

스페인 성직자들조차도

원주민의 처지를 동정할 정도였지요.

어느 스페인 성직자가

하느님이 멕시코 원주민에게 내린

열 가지 역병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천연두나 전쟁 같은 것 외에도

노동 혹사를 꼽았지요.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지요.

“아홉 번째 역병은 광산에서의 노역이었다.

인디언들은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광산까지 180마일 이상 걸어야 했다.

그러다 양식이 떨어지면

광산에서나 길에서 죽어갔다.

그들에게는 양식을 살 돈도 없고,

먹을 걸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지친 상태에서

집까지 왔다가 쓰러져 죽기도 했다.

광산에서 죽은 인디언들과

노예의 시신이 악취를 풍기고

페스트를 퍼뜨렸다.”

 

이런 극심한 노동착취가

스페인 제국의 부를 뒷받침하는

밑바탕이었습니다.

카를 5세와펠리페 2세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에

패권 국가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사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자본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차라리 약탈과 착취가

자본주의 이전 패권 국가의 근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기한 일은 폭력으로 그렇게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수취해갔는데도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 시대의

스페인 제국이 항상 재정난에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이야기는 또 다른 강의의 주제가

되어야 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