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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문학사의 중요한 이정표

기번은 몽테스키외의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과는

차별화되는 책을 구상했습니다.

몽테스키외가 세세한 사실들을 가급적 생략하고

쇠퇴원인을 몇 개의 명제들로 제시하는 방식이었다면,

기번은 오히려 구체적인 역사 서술을 통해

로마 제국이 왜, 어떻게 쇠망했는지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문학성도 갖추어야 했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가

영국 문학사의 중요한 이정표들 중 하나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총 6권의 책으로,

세 번에 걸쳐 출간되었습니다.

1권 서문을 보면

애당초 저술기획은 그렇게 방대하지 않았습니다.

기번은 로마제국의 쇠망이

2세기부터 15세기까지 1300년에 걸친 과정이라

보았지만,

자신은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만 다루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앞으로 한 권만 더 쓰면 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최종 출판결과는 판이했습니다.

두 권을 더 쓰고야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마무리했고,

스스로 쓰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던

동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위해,

그 후로도 세 권이나 더 썼습니다.

 

이 같은 저술기획의 변경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대중의 뜨거운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1권을 출간하자마자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향이 일어났고,

5년 뒤 2~3권을 내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무렵 『국부론』을 출간했던 아담 스미스조차

기번을 "유럽 문단 전체의 선두주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마 그 이면에는

당시 영국의 시대 분위기도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미국식민지의 독립을 계기로 영국인은

그들의 제국이 쇠퇴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쇠망이라는 타산지석으로

대영제국의 위기를 성찰해 볼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출간한 후

기번은 졸지에 큰 수입원이 생겼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평생 갈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동로마 제국까지

천년의 역사를 더 쓰는

고된 작업을 감수하겠다고 결심했죠.

하지만 그 마지막 세 권은

그의 책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국의 쇠망과정을 보여준다는,

처음 세 권의 문제의식은 거의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기번 자신도 『로마제국 쇠망사』 5권에서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너무 허약하고 비참해서

단조롭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라고

고충을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을

쉽게 죽지 않는 중환자 같다고 여겼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뒷부분의 그런 문제점은,

1952년 최초로 제작된 영어 축약본에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축약본은 전체 16 개장인데,

원작의 4~6권에 해당하는 부분은

단 한 개의 장만 할애했습니다.

축약본 저자 손더스는

"기번이 충분히 사료를 읽지 못한 것 같다"며

4~6권을 과감하게 생략해도 좋다고 평가했습니다.

저 역시

기번이 로마제국의 쇠망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살피려면

1~3권에만 집중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3권 말미에서 기번은

서로마 제국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린 황제가 용병대장에 의해 유폐된 후

더 이상 황제가 옹립되지 않은 가운데,

침입한 게르만 부족들이

제 각기 서로마 제국 곳곳에 왕국을 세웠다"

그 뒤에 '서로마제국 쇠망의 개관'이란 짧은 에세이가

덧붙여졌습니다.

마치 죽은 서로마제국의 무덤 앞에

묘비명을 세우듯이 말입니다.

기번은, 그 에세이를 쓰면서,

그랜드 투어에 나섰던 10 수년 전

로마의 폐허를 내려다볼 때처럼,

깊은 감회에 휩싸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독자에게 전하려는 듯,

이런 감상적인 한 구절을 써넣었습니다.

"로마가 쇠망한 것은

무절제한 팽창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였다"

바로 성자필쇠의 숙명론입니다.

아마 그는 대제국이 숨을 거두는 순간을 기술하면서,

문득 그런 무상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