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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내용 구성

1~3권 전체를 통해

역사가 기번은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대한 냉철하게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멸망한 원인을

밝히려 했죠.

그리고 '서로마제국 쇠망의 개관'에서

다시 그것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승리와 야만족의 침입,

이 두 가지를 축으로

서로마제국의 쇠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번은 한 번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내부적 요인을

외부적 요인보다 더 중시한 듯합니다.

즉 기독교의 승리가

게르만 족의 침입보다

시기적으로나 비중에 있어서 더 우선한다고 본 것이죠.

 

그런 의도는 이미 1권의 내용구성에서 확연합니다.

총 16개장 가운데,

기독교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데 2 개장을,

게르만 족에 대해서는 1 개장을 할애했습니다.

기독교의 성장과정에 대한 설명에는

이곳저곳에서

기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도는

시민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혐오한 나머지,

어떻게든 국가와 군대의 요직을 맡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박해를 극복하고

승리한 뒤에 일어난 사태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기독교도가 교회 내부의 불화 과정에서

서로에게 가한 고통이

광적인 이교도에게 당한 박해보다

훨씬 가혹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3권 말미의 '쇠망의 개관'에서

기독교의 문제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종교의 목적이 내세의 행복에 있는 만큼,

기독교의 도입 혹은 악용이

로마제국의 쇠망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군인정신이 수도원에 묻히고,

세금을 내야 할 돈이

자선과 헌금의 명목으로 탕진되었다"

그런데 기번의 이런 기독교 책임론은

4~5세기 무렵

로마제국의 이교도 지식인들이 쏟아내던 불평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게르만 족이 국경 안으로 물밀 듯 들어와

수도 로마까지 약탈하는 사태를 보면서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마침내 기독교를 승인한 뒤부터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고 말하곤 했지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그런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유명한 『신국론』이란 책을 썼습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 승리 이전에

이미 타락하고 온갖 재난을 겪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기번은 이처럼 이교도들과 같은 입장이었지만,

분명 기독교에만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궁색한 설명이라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런 질문들이 예상되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로마제국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내세로 돌리는

기독교가 승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전에 이미 내부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기번은 이 점을 의식했던 것이 분명하며,

1권의 대부분과 2~3권에서

그 의문을 풀어줍니다.

그가 '인류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대'라 평가한

5 현제 시대 이후,

제국이 왜, 어떻게 망가졌는지 드러납니다.

 

이때, 기번의 관점은

훗날 전문가들이 '3세기 위기'라고 부른 것과 흡사합니다.

그는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흉악한 황제로 묘사된 '코모두스' 때부터 시작된

오랜 내전 사태에 주목했습니다.

그 와중에 군대가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붙일 만큼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었습니다.

황제들은 군대의 충성심을 사기 위해

화폐를 남발해 인플레를 초래하고,

또 증세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화폐경제가 망가졌고, 증세에도 불구하고 국가재정이 파탄했습니다.

막강했던 제국 군대도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군인정신이 실종되고, 기강이 해이해졌습니다.

그러나 황제들은

변경 안으로 들어와 있던 게르만 족 정착민에서

병사들을 징집하는

편법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변경을 지키는 제국 군대와

변경을 위협하는 야만족이

서로 같은 종족이 되어 간 것입니다.

 

이처럼 오랜 내전 동안 국가 중추 즉,

'황제, 권력 엘리트, 군대'에서 일어난

분열과 타락을 가리켜

기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것들은 마치 독극물처럼 은밀히

제국의 몸 안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제국이 그렇게 병들었기에

기독교가 승리한 것이겠지요.

다시 말해, 기독교는

병든 제국과 그 황제들로부터

백성의 애국심과 납세의무를 탈취해 간 셈입니다.

비록 기번 자신은

이런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행간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번은 제국 말기에 수세에 처했던

이교도 지식인들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었기에,

그 점을 대놓고 인정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